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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용감무쌍 '삼국의 지배자 고구려'의 유적지로

떠찌 기자 2022. 9. 19. 13:06

&rdquo;<사진출처_국립문화재연구원>&rdquo;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부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경주,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 ‘용감무쌍의 고구려 역사가 있는 연천’. 오늘은 용감무쌍의 나라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 떠날 예정이다.

 

사실 한국에는 고구려의 유적지가 많지 않다. 고구려의 도읍이 지금의 중국 지린성과 북한의 평양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영토가 한반도 보다는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쪽으로 더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고구려의 영토가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고구려는 북벌 정책을 중요시했기에 대부분의 유적지가 북한과 중국에 남아있다.

 

 

'용감무쌍한 나라 고구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과 그의 부하들이 남쪽 압록강 상류 졸본성(홀본성)에 정착해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 당시 백제를 세운 여인 소서노와 그의 아버지 연타발의 도움이 컸다. 고구려는 산악지형에 자리 잡은 국가로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 그로인해 약탈경제로 발전하여 일대의 국가를 정복하면서 차차 국가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아마 고구려를 용감무쌍의 나라, 말을 잘 타는 나라, 활을 잘 쏘는 나라 등 이러한 표현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고구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rdquo;<사진출처_트러치>&rdquo;

'고구려의 전성기와 멸망'

고구려의 전성기는 제17대 왕 소수림왕으로부터 시작된다.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며, 태학을 짓는 등 국가의 학식과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제19대 왕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 시켰다. 광개토대왕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광개토’는 영토를 넓게 개척했다는 뜻의 이름이다. 직위 초부터 백제에 공세를 취했으며, 훗날 백제의 58개 성과 700 촌락을 차지하며 강한 국력을 다졌다. 그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에게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아냈으며,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에서 영안, 동쪽으로는 훈춘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제20대 왕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했으며,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여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과시했다. 또한 백제의 개로왕을 죽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광개토대왕 못지않게 여러 주변국을 정복하여 더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부국강병은 영원하지 않았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연이은 공세가 있었고 고구려 내부에서도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양제의 공격은 을지문덕과 여러 명장의 활약에 격퇴한다. 수양제의 침입이 끝나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이 생겨난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새 왕조 당과 저자세였던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앉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라를 움직인다.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들끼리 권력다툼이 이어졌고, 그의 첫째 아들 연남생은 동생들에게 권력을 뺏겨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의 멸망에 큰 공을 세우며, 용감무쌍한 고구려는 역사로 사라진다

 

 

&rdquo;<사진출처_연천군청 제공>&rdquo;

'경기도 연천에 남은 고구려의 역사'

호로고루

한국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지는 대부분 우리나라의 최북단인 연천 쪽에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의 호로고루성이 있다. 이곳은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 위에 있는 성이다. 이 성은 고구려가 남진하기 위해 육로로 내려오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호로고루성이 위치한 지역은 삼국시대에 북진과 남진을 하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던 곳이다. 호로고루성의 특징은 남쪽으로 수직 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특별히 성벽을 쌓지 않더라도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발굴 당시 성벽, 목책 유구, 지상 건물터, 지하식 벽체 건물터,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시대까지 출토되었는데 특히 고구려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 기와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인들이 만든 기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기와가 왕궁이나 사찰 등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건물에만 사용되었던 건축자재였던 것으로 보아 호로고루성은 다른 성들보다 위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rdquo;<사진출처_연천군청 제공>&rdquo;

당포성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당포성은 삼각형 단애 위에 축성되어 있으며, 입지 조건과 평면 형태 축성 방법은 호로고루와 은대리성과 유사하다. 이곳은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매우 큰 곳이었다. 또한 나당 전쟁 이후 신라가 진출하여 당포성의 외벽에 석축벽을 덧붙여서 보강하고 사용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당포성은 토성과 석성의 축성기법을 결합한 구조로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의 축성기법과 같은 기술적 계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rdquo;<사진출처_연천군청 제공>&rdquo;

은대리성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에 있는 은대리성은 연천의 호로고루와 당포성과 함께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성이다. 은대리성에 관한 문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은대리성 역시 호로고루와 같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천의 당포성과 호로고루와 함께 각형 모양의 독특한 강안평지성이며, 토축과 석출을 결합한 독특한 고구려의 축성기법을 사용하여 축성된 성이다.

 

'우리의 역사를 지키자'

국내에서 많은 고구려의 유적지를 가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고구려의 흔적과 역사가 국내에서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 한반도의 용감무쌍한 고구려의 역사 최근 중국은 이 역사를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를 ‘동북공정’이라 한다.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든다는 것이다. 중국은 고조선사•고구려사•발해사 등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속국에서 일어난 분쟁이라고 표현하며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중국의 행동에 우리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가능할 것이다.

 

*노객 : 신하가 임금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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