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4•19혁명 그날 이후

떠찌 기자 2023. 3. 15. 16:35
 

4•19는 주도세력인 학생들에 의해 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 학자들은 4•19를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했다. 어떤 경제학자는 4•19를 국가 독점의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한 민주적 혁명이라 평가했다. 4•19혁명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사건이었다. 조선왕조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반 백성이 정치에 참여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대부분 소수의 양반 신분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도 마찬가지였다. 세금을 했지만 정치적 권리는 없었다. 국민이 정치적 주권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에 의해서였다. 그 국민이 봉기하여 정부를 무너뜨린 것이 4•19혁명이다. 이런 일은 한국사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일이었다. 4•19혁명 이후 대한민국 국민에게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고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혁명이었기 때문에 혁명 결과 권력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정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를 선고해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됐다.

 

국민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국이 안정되고 나라가 발전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은 시끄러웠다.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다툼이 화근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 정변을 일으킨다. 장면은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도망갔고 윤보선은 대처하지 못해 박정희의 정변은 성공하고 만다. 기존의 정부에 실망한 일부 지식인들은 박정희가 군사 정변을 일으키자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실제로 4•19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서울대학생회는 4•19를 계승한 군사혁명으로 환영식을 거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정희 그 역시 권력을 따라가는 독재자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4•19혁명은 정권을 뒤집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한국 국민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다. 또한 4•19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척 승리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라고 언급했다.

 

 

<출처_메이저월드>

이제 4월의 연재 기사인 4•19혁명 시리즈를 마무리하려 한다. 필자는 4월에는 반드시 4•19혁명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에 민주주의의 꽃이 피기까지 수많은 학생과 국민의 노력과 피가 스며들어있다. 이 고귀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잘 지켜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의식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과연 지금의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민주주의를 잘 지키고 있는지 국민이 감독하고 심판해야 한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참여하는 세상은 올바른 세상이 아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의의가 잘 지켜지고 있는 나라일까?

 

 

 

[기획기사] 4•19혁명 그날 이후

4•19는 주도세력인 학생들에 의해 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 학자들은 4•19를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tru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