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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조’의 효심으로 축성된 ‘수원화성’의 아름다움

떠찌 기자 2022. 9. 5. 10:15

<사진출처_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소개서 갈무리>

오늘의 여행지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축성된 근대 성곽 건축의 백미인 ‘수원화성’(이하 화성)을 소개한다.

 

경기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20-2에 위치해 있는 화성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이다.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는 선왕인 영조에 의해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전하면서 당시 화산에 있던 관청과 민가들을 이전할 계획으로 화성을 축성했다.

 

화성은 서울의 남쪽을 방어하는 기지의 역할과 인과 덕에 의한 정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의 원대한 계획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정조는 화성을 짓고 수도를 수원 옮기고 싶어 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향한 극진한 효심을 바탕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모든 것들을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기술이 총 결합돼 축성된 성이다. 또한 실학의 최고의 권위자 정약용을 필두로 단원 김홍도, 번암 채제공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화성이 탄생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 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의 바깥쪽을 쌓되 안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을 사용했으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공법과 목재와 벽돌의 조화로운 사용을 보여준다. 또한 거중기, 활차, 녹로 등 근대적 기기의 발명과 사용 등 기능성과 과학성 심지어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완벽에 가까운 건축물이다.

 

 

<사진출처_네이버 나무위키 갈무리>

<화성의 다양한 건축물>

 

◆ 팔달문

화성에 여러 문들이 있지만 그중에 ‘팔달문’은 규모가 가장 크고 수원의 중심에 있는 문이다. 수원 화성의 남문으로 정조는 팔달의 의미를 ‘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라는 의미로 풀이했다. 팔달문은 축성 당시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공사 감독과 석공의 이름을 새긴 실명 판까지 원형 그대로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2013년 처음으로 문루 전체를 수리했는데 훼손된 목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수리했다.

 

 

<사진출처_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소개서 갈무리>

◆ 북수분, 화홍문

경복궁에는 경회루가 있다면 화성에는 화홍문이 있다. 사실 이곳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누각의 원래 기능은 적군을 상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었으나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정자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야간이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장소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장소다. 그 외에도 화성에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있으며, 당시 정조가 얼마나 고민하여 축성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사진출처_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소개서 갈무리>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살아 숨 쉬는 화성행궁

‘화성행궁’ 조선시대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춘 이름다운 궁궐로 손꼽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전한 후에 아버지를 뵈러 올 때마다 머무는 행궁으로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으며,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해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그 결과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됐다.

 

행궁의 뜻은 왕이 지방에 있을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요즘의 표현으로 한다면 별장 같은 개념이다. 행궁의 용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사용했던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화성행궁과 같이 지방의 능원에 참배할 때의 목적으로 사용한 행궁이 있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건축한 행궁 중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대부분 건축물이 전소되거나 파손되어 지금은 낙남헌과 노래당 만 본래 모습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사진출처_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소개서 갈무리>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화령전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 즉 왕의 초상화가 있는 곳으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삼문과 외삼문까지 갖추었다. 화령전은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1804년 처음 화성에 와 현륭과 건릉에서 제사를 올리고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다. 그가 왕좌에 있는 동안 총 10차례 회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다 한다. 이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와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종은 ‘수원화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원대한 꿈을 이루려 했다. 하나 화성이 지어지는지 얼마 안 돼 정종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품으로 가게 된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불러온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 그가 진정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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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소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