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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국보훈의 달, ‘작전명 폭풍 224’ “남한을 점령하라”...6.25의 아픔
    기획 2023. 5. 3. 11:15
    6월 호국보훈의 달 현충원 이미지_ <출처_메이저월드>

    어느덧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찾아오고 있다. 6월이 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대한민국 역사에 6월은 참으로 슬픈 날들이 많았다. 6·25전쟁,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달이다. 그래서 트러치 6월 기획 시리즈는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 아픔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작전명 폭풍 224

    때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고요한 새벽을 깨우는 포탄과 총소리가 대한민국 하늘을 가득 메웠다. 바로 북한이 대한민국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시 북한의 김일성은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해서 이승만이 북침했다고 거짓 주장을 하며 헌법에 따르면 오직 내각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으니 빨리 남측에 대한 역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내각은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 하였고 북한의 정권은 최종적으로 남침을 감행한다.

     

    새벽 4시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북한은 남한을 침공한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전쟁하기 매우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1950년 6월 25일은 여름 날씨였으며 장마철이었다. 군대가 진군하기 매우 어려운 날씨에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켰다.

     

    김일성이 6.25에 전쟁을 발발한 이유를 들어보면 8.15 광복절에 맞춰 남북통일 선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김일성은 남한을 2개월 만에 복속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6.25 전쟁 참상_ <출처_메이저월드>

    군사력의 차이, 이길 수 없는 전쟁.

    1950년 6월 당시 북한국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반에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은 소련의 무기를 도입하기 군사력의 차이를 분명하게 했다. 북한국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 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6.25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은 없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간 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군사력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 같았다. 그러나 우리 한국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포탄을 들고 적의 탱크와 벙커로 뛰어들어 자폭한 육탄 10 용사, 맥아더 장군의 마음을 움직인 참호 속의 용사. 한국군은 북한의 군사력 차이에 두려워하지 않고 강인한 임전무퇴 정신으로 나라를 수호했다.

     

     

    6.25 전쟁 참상_ <출처_메이저월드>

    도망가버린 국군통수권자.

    전쟁 당시 국군통수권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정체를 숨긴 채로 6월 27일 새벽 2시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을 떠났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와 부대통령도 대통령의 비신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피신 사실을 알게 된 경위는 국회에서 전선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라 6월 27일 새벽 4시 서울 사수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했는데 이때 이승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군통수권자가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셈이다.

     

    서울의 함락 그리고 한강 방어선을 지켜라.

    전쟁 발발 이후 우리 군은 북한의 전차를 막기 위해 육탄전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북한의 기갑전력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26일 2시 의정부가 함락되고, 27일 13시 창동 방어선이 붕괴, 28일 6시 미아리를 끝으로 28일 12시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됐다. 더 이상 북한 군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기에 한국군에게 한강 방어선은 정말 중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북한 군의 남하를 저지해야 미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남은 기간은 6일. 6일 동안 한강 방어선을 지켜야 했다.

     

     

    6.25 전쟁 참상_ <출처_메이저월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 간 한국군.

    6.25 전쟁 당시 남한은 제대로 된 전쟁 대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 국가가 제대로 전쟁 계획도 있지 않았다. 또한 너무 이른 한강교 폭파로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면서 결국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 남한 정부는 서울을 버리고 임시수도를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했다. 한국군의 전력은 너무도 열악해 호남 방면은 사실상 방어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7월 20일 대전과 전주가 북한군에게 점령되고 결국 한국군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까지 후퇴한다.

     

    많은 사람이 최후 후퇴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갔다 하여 대충 만들어진 전선으로 생각하는데 낙동강 방어서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한국군과 유엔군이 교정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어선이었다. 그래서 더욱 견고한 방어선이었으며, 어떠한 방어선보다 가장 안전한 방어선이었다.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에 도달한 북한군은 전투력의 한계를 느꼈고 그로 인해 전세 역전의 상황이 펼쳐졌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진주, 마산, 대구, 칠곡, 영천 지역을 회복했으며, 대 반격을 노리는 계기가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낙동강 전선으로 전세 역전이 펼쳐진 상황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스탈린 그라드 전투,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하다고 불리는 인천 상륙작전 코드네임 ‘크로마이트 작전이다.

     

    서울이 북한군 손에 들어가기 전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국군, 그리고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른 북한군의 요인으로 7월 20일 공식적으로 이 작전은 폐기 됐었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펼쳤을 때 맥아더 장군은 부산 주변 포위선을 뚫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병력에 많은 제한이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해법으로 폐기했던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hearts)을 바탕으로 다시금 상륙 작전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작전명 Operation Chromite로 실행된 인천 상륙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UN군 사령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세계 전사 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하게 한 명장이었다.

     

    9월 15일 새벽, 인천 상륙작전이 간행된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도 북진이 시작됐다. 이에 북한 정부는 북한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9월 28일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30에는 낙동강에서부터 북진하던 국군과 상륙군이 만나게 되었다. 10월 1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10월 9일 원산을 점령하였고 서부 전선에도 북진이 시작되었다. 10월 19일 평양직할시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입성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통일이 될줄 알았다. 전쟁이 한국군과 유엔군의 승리가 될 줄 알았다.

     

     

    6.25 전쟁 참상_ <출처_메이저월드>

    중공군의 참전 그리고 분단의 아픔.

    10월 중순 갑자기 중군 인민지원군이 한반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해전술로 대공습을 벌였다. 당시 중국군은 무식하게 총알받이를 앞세워 돌격만 하는 게 아니라 많은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집단 운용하여, 신속하게 한 곳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상대의 지휘 체계를 교란해 부대 전체를 와해시키는 포위 전술을 구사했다.

     

    결국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였고 1월 4일 다시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금강 전성까지 밀리게 된 유엔군과 한국군은 한반도를 포기하는 전략을 세웠고 대만처럼 후일을 도모하는 옵션도 검토했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자 3월 다시 서울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점령할 수 있었다. 이후 어려 싸움이 벌어졌고 금성 전투를 끝으로 지금과 같은 휴전선이 유지되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 .

    6.25 전쟁 이후 우리에게는 분단의 비극만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평생을 가족과 생이별 해야 하는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했다. 당시 국군장병 26만 병이 전사하였고, 남한 국민 100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유일 분단의 아픔을 여전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한반도.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유엔군과 한국군 그리고 여러 나라들의 지원 그 피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선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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