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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다시 꽃 피우리라 ‘4·19혁명의 시작’
    기획 2023. 3. 14. 16:36

     

     

    마산의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4월 19일 화요일은 피의 화요일이라 불린다. 그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동안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대학생들까지 들고일어났다.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4월 19일 시위 동안 1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은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시위에 겁을 먹었는지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사태의 원인도 모르고 “난동이다 폭력 시위다”라고 이야기하며 허둥댔다. 이러한 한심한 행동에 군대와 미국도 이승만에게 등을 돌렸다.

     

    3월 19일 신문에 실린 소식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깡패들이 시위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해 폭력을 자행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국민에게 큰 분노를 가져왔다. 대학생들은 21일 예정인 시위를 앞당겨 19일에 진행하는 것으로 바꾸고,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19일 오전 11시에 시위를 시작할 것이라는 역정보를 동대문경찰서에 흘린 뒤 실제 19일 오전 9시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수백, 수천여 명이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이승만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서울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시위대가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로 나오자 일반 시민까지 시위대에 합류해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가 형성됐다. 이들은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의 진압 역시 만만치 않았다. 공포탄과 최루탄, 무차별 폭력 등으로 21명 사망, 172명 부상의 결과를 낳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무대 앞에서는 경찰의 무차별 진압에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사망자 수는 104명이었다.

     

     

     

     

    사망자가 늘어나고 무차별적인 경찰의 진압에도 시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평화 시위로 시작한 시위가 점점 무력 시위로 변해갔다. 시위대는 먼저 이승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방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타 사라졌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4•19혁명의 주도는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 시내 소재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이 더럽고 추한 이승만의 야욕에 들고 일어났다. 마산의 김주열 열사의 사건으로 같은 또래인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먼저 나섰고 참여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 지역에서도 4•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여한 것은,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이후 점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4•19혁명의 주도층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1월 19일 당시 고등학생들의 시위에 서울대 물리과 대학 학생들이 함께하면서 종로로 진출했다. 이어 법대, 약대, 수의대 등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고 사범대까지 합류하면서 시위의 규모는 확대됐다. 의대생들은 의사 가운을 입고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어 건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연세대, 중앙대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10만 명까지 불어나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은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 지역 일대에 긴급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달리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무력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어가기 시작했다.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워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무차별적인 총격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시위대는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말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다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었다. 이때 놀랍게도 제15 사단장 조재미 준장 당시 4•19혁명 서울 지역 위수 계엄사령관이었던 그는 단 두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고려대 컴퍼스에 진입했다.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 태극기로 덮인 시위 희생자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그 모습에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게 됐다.

     

     

     

     

    당시 4•19혁명 서울 지역 위수 계엄사령관이었던 제15사단 조재미 준장은 계엄군에게 세 가지 원칙을 지킬 것을 각급 부대에 지시했다고 한다.

     

    첫 번째,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 및 폭력을 금한다.

    두 번째,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세 번째,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받는 것을 금한다.

     

    이승만을 지지한 미국도 4•19혁명으로 등을 돌리고 만다. 그동안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4월 19일의 사태는 달랐다. 월터 패트릭 매카나기 주한미국 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알렉산더 허터 미 국무부 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 각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이 각서는 사실상 미국이 이승만을 버렸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미국과 서구 자유 진영 국가들이 이승만에게 등을 돌린 지 얼마 안 돼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 그날 이기붕은 부통령 단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국민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강상태가 되어가던 시위의 불길을 다시 타오르게 만든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 교수단의 시위였다.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이르렀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규모는 삽시간에 1만 명까지 불어났다. 여담으로 이 시기 대학교 교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벼룩을 일렬로 세우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당시 유교 문화가 진하게 남아있던 시정이라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비판적으로 봤다. 하지만 그만큼 교수들 사이에서도 이승만의 만행은 봐줄 수 없는 파렴치한 행동으로 봤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전 시위에서는 “선거를 다시 해라”가 주요 요구였다면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시위에 신기했던 것은 단 한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권위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지만 무장한 군인들은 시위대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 속한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에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라고 외쳤다. 이 모습을 본 군인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으며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대 건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듯한 환영과 환호, 박수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을 지킬 마음이 사라졌으며,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어있었다.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됐다. 늙은 독재자의 구역질 나는 모습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많은 사람의 설득으로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한다.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승만을 즉시 하야하고 정부통령선거 재개, 내각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 날 오후 3시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과도내각을 수립했다. 후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은 붕괴하였다. 이기붕은 28일 장남 이강석의 자결 총격으로 일가족이 모두 동반자살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이승만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사망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민이 바라던 민주화의 꽃은 다 피지 못했다. 국민은 알지 못했다. 이승만 뒤에 더한 파렴치하고 구역질 나는 놈들이 있다는 것을.

     

     

     

     

    [기획기사] 우리가 다시 꽃 피우리라 ‘4·19혁명의 시작’

    마산의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4월 19일 화요일은 피의 화요일이라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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